본문 바로가기

Life in the UK

너네 집에 가서 같이 영화 보자


사실 이 사건은 약 일주일 전 쯤 있었던 일인데, 이제서야 조금 시간도 쪼끔 있고 객관적으로 쓰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어 기록해 본다. 학교 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친하게 된 파키스탄 아저씨가 있었다. 처음에 같은 전공자끼리 만나는 모임에서 같은 조가 되어서 잠깐 얘기를 했는데 그 땐 진짜 찌질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 의미는 내가 외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아예 친해질 가능성을 접어두진 않는다는 의미다. 


아무튼 아저씨는 눈썹이 갈매기처럼 하나로 이어져있고 담배를 폈으며 무척이나 외소하셨다. 갈매기 눈썹이야... 한국에선 보기 힘든 거니까 생소하지만 그러려니... 했고 담배 피는 건 내 남자만 아니면 되니까 상관없고... 난 쫌 건장하고 근육도 좀 울퉁불퉁 있는 거친 남자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암튼 외모만으로 본 첫 인상은 내가 최고로 치는 것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 이런 얘길 굳이 하냐면 내가 그 아저씨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0%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였지만 그냥 인상착의를 얘기하고 싶었음 ㅇㅇ. 이런 느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알고보니 지도교수가 같았고 얘기 하다보니 말도 잘 통하는 것 같고 편해서 우리 사이는 그렇게 점점 친해졌지. 아저씨가 종종 문자를 보내서 잠깐 만나서 수다떨자고 하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는 내 자리까지 맡아주더라고... 갑자기 반말로 변했네. 그냥 그러려니 해라. 쓰다보니 빡이쳐서 그래.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메신저 창을 띄우더니 '너 뭐 재밌는 영화 파일 있냐' 그러더라구. 참고로 당시 시간은 평일 저녁 7시야. 아래는 우리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대화체로 작성한거야. 


너 뭐 재밌는 영화 파일 있냐


있긴 있는데.. 너가 좋아할 지 모르겠는데? 


그래? 그럼 너네 집 가서 같이 보자.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뭐? 왜 우리 집이야? 


그냥.. 오늘 와이프하고 애가 삼촌네 가서 심심하걸랑. 


이 때 난 'are you crazy? fuck off' 라고 외쳤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름 우린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난 이렇게 친절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지. 


헐. 우리 집은 남자 출입 금지야. 


에잉? 왜? 


그게 내 룰이야.


그런 룰이 있을 줄은 몰랐네? 


난 늘 이런 룰이 있었어. 한국에서도 그렇고. 파키스탄도 한국처럼 보수적인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봐? 


뭐.. 친한 친구면 집에 놀러갈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닌가? 


난 그런 거 시른데? 


글쿠나.. 하나만 더 물어보자. 남자는 낮에도 못 가? 


어.


글쿠나. 


어 그럼 나 공부하러 간다 빠잉.


이러고 대화를 끝냈어. 이 때까지만 해도 걍 놀러오고 싶어서 그랬거니.. 라고 순진하게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랬더니 좀 있다 문자가 띡 오대? 


오늘 이 대화로 인해서 너에 대한 존경이 더 커졌어. 공부 방해해서 미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때서야 난 뭔가 잘못되었었다는 걸 겨우 깨달음. 그 전에는 그 정도로 존경/존중받지 못할 레벨이라고 생각했던건가? 이 ㄱㅅ가 진짜 사람을 ㅂㅅ으로 생각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딱 들었고 진짜 섹슈얼한 의미로 나에게 접근을 했던 거였구나 라는 삘이 팍 왔지. 유부남에 애도 있고 나한테 그렇게 이슬람의 숭고한 의미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자기는 교리를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며 열변을 토하기에 진짜 윤리적인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구나 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 


여기 동기한테 자세히는 얘기 안 하고 대충 저러더라고 하니 '중동 아저씨들의 동양 여자 사랑이란...' 이러더라. 중동 아저씨들인 진짜 자주 들이대나바. 아시아 여자애들한테. 내가 '유부남이고 애도 있는데?' 라고 하니 '알 게 뭐야' 라는 답변... ㅋㅋㅋㅋㅋ 그렇구나. 난 늘 다 큰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라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외국인이고 심지어 유부남이고 심지어 이슬람의 교리를 나에게 설파하고 심지어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아저씨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측도 못하고 나의 '이성관계'에 대한 논리를 이 아저씨에게 적용하지 못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전까진 그 아저씨가 나에게 이성적, 섹슈얼한 느낌으로 나를 대한다는 인상이 전혀 없었다고! 


어쨌든 이번에 깨달은 건 그거야. 어딜가나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남자와는 아예 친해지지도 말자. 


그 이후로 그 아저씨는 나에게 문자, 메신저 등으로 연락이 전혀 없었고 이러한 행태는 그 아저씨가 정말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줬어. 만약 정말 순수한 의도였으면 그 이후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친하게 지내려 했을텐데 말이지. 아무튼, 그 이후로 수업시간에 만났는데 난 인사 정도는 받아줬지만 철저히 무시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 대신 다른 여자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지. 그리고 반지끼고 있으면 남자친구 안 생긴다는 남자사람친구의 조언에 따라 빼고 다녔던 반지를 다시 끼고 다니기 시작했어. 근데 여기 친구한테 얘기하니까 반지 정도로는 그런 것들로부터 protect가 안되고 결혼했고 30대다. 라고 말해야 protect가 확실히 된다고 하더라고. 한국이나 여기나 다들 어린 여자 좋아하는 건 똑같은가봐. 쯧. 


근데 어쩜 그렇게 직접적으로 니네 집 가자 그러냐? 아오 시발새끼. 별 병신 잡것들이 지랄이야. 빡쳐. 



반말과 욕설이 쪼끔 있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욕을 안 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좀 쓰고 싶었네요. 


쓰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함. 




'Life in the U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생활 잡담  (8) 2012.11.03
10월 말까지의 집밥  (4) 2012.10.28
최근 의식 속 부스러기들 1  (4) 2012.10.23
Your English is okay  (0) 2012.10.12
두 번째 미팅 후기  (4) 2012.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