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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ing Pains

기억, 두 번째 이야기-호우시절, 허진호



<스포일러 약간-_- 있어요>


호우시절을 본 후 가장 마음 깊숙한 곳에 남은 것은 나이들어가며 멋있어지는 정우성도, 진한 아이라인 따위 없어도 예쁜 고원원도, 바람소리가 보이는 것만 같은 대나무 숲도, 숨막힐 것만 같은 격렬한 키스도, 다시 찾아온 두근두근한 사랑도, 그 아무것도 아니고 바로 기억에 대한 기억이다. 


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메이는 중국에서 우연히 만난 유학시절의 남자친구인 동하와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동하와 다시 시작한 시간, 그 순간의 메이는 남편을 잃은 아픈 기억 따위는 모두 잊은 듯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 그렇게 괜찮아지는 건가봐-"라고 작게 속삭였는데, 상대방으로부터 "너가 얼마전에 썼듯이, 기억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이 경우에는 그게 적용되지 않아.'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고집쟁이로부터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그저 입을 꾹꾹 다물고 있었다(-_-). 앞서 썼던 ''이라는 글을 통해 그는 기억의 본래 역할을 간과하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본래 기억하거나 기억되는 것이다.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론 호우시절의 메이는 남편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지만 그녀 역시 그 아픈 기억을 잊어가고 있는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동하의 존재로 하여금 잊게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내게 그녀는 결국 그 기억이 남아있는 것, 그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것,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유학시절 동하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줬지만, 자전거에는 죽은 남편과의 추억도 담겨있어 메이는 동하에게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아예 배운 적도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슬픈 기억을,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자전거 따위 타고 싶지도, 탈 줄 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픈 기억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 그녀는 자전거에 올라선다. 


만약 그녀가 기억을 잊었거나 잃었거나 그러고 있는 중이었다면 끝까지 자전거 앞에서 자전거를 타려는 그 순간 순간마다 '왜 그런 중요한 일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잊어버린거지. 나는 어느 새 그것들을 잃어버린 걸까.' 라며 자책하고 곱씹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동하에게 거짓을 말한 것처럼, 그리고 '나 가야돼-' 라고 말한 것처럼. 그러나 오히려 동하는 자전거를 그녀에게 선물함으로써 잊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그 역시 그녀의 아픔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때서야 그녀는 혼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페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아픈 기억은 기억됨으로써 극복된다. 기억하는 것으로 그 기억의 대상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내 의지로 받아들인 기억의 무게와 나도 모르는 새 잊혀져 있는 기억의 존재를 인식할 때의 무게는 분명히 다르다. 어쩌면 면죄부를 얻기 위한, 가장 이기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미안해- 나도 살고싶어, 라고 아주 작게 속삭인 후에.


시간이 해결해준다, 는 말은 비단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잊게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아픈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조성빈이 부른 엔딩곡, falling down이 최곤데.
아직 OST 발매가 안됐다고...

아쉬운대로 이거라도 들어봅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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