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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n the UK

첫 제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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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스튜던트 신드롬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교수님이 미팅 전 날에 보내라고 하셔서 난 오늘 오전 중에만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기가 "어 그럼 월욜 아침에는 받아볼 수 있게 일욜 새벽에는 보내놔야겠네" 라고 하는 바람에 또 엄청 급하게 급하게 서둘러서 새벽 6시 제출을 완료했음.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커다란 테이블 몇 개가 페이지를 가득가득 채우고 있는 전체 분량 6장 짜리의 워드파일임. 


느낌은 걍 .. 뭐랄까 내가 봐도 거지같고 단순해서 .. 사고의 흔적이 크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뭐... 그냥 그렇다. 교수님이 테이블로 정리해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진짜 이런 저런 자료는 많이 봤는데 테이블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생각보다 집약되는 정보가 많은데 보기에는 심플해서 별로 노력을 들인 티가 나지 않는다. 물론 1차 데이터들을 직접 찾아본 게 아니라 원래 들여야 하는 노력보다 덜 했던 건 맞지만.. 그냥 아쉬움이 남을 뿐. 


그래도 며칠 전부터 처음부터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고 계속 생각했다. 어차피 내 딴엔 완벽하게 해서 낸다고 별 난리를 다 쳐도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진 리소스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기. 그렇게 하고 깨지고 다시 하다 보면 처음부터 무언가를 보고 분석하고 쓸 수 있는 역량도 범위도 더 확장되도록 훈련이 되어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음. 안되면 어케 ㅜ? 



읽어야 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활용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원래는 집에서 공부하는 인간이었는데 도서관에 가서 하니까 공부가 훨씬 잘 된다. 당분간은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굳이 수업을 하지 않아도 교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당분간은 시간이 빨리 갈 듯 하다.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두렵기만 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두려움 속에서 신이 났다. 역시 일할 때 쓰는 머리와 공부할 때 쓰는 머리는 달라... 일할 때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그다지 신이 안 난다. 대신 머리를 쓴 후, 몸을 움직인 결과가 긍정적일 때 신이 나지. 일의 영역과 떨어진 곳에서 공부라는 걸 오랜만에 하는 건 사실이고 조금씩 조금씩 공부가 재밌고 신나는 거였다는 느낌을 되찾고 있는 것만 같다. 이거 역시 서두르고 욕심부리지는 말아야지. 공부도 밀당이다. 내가 너무 오버해서 다가가면 그만큼 밀쳐지게 되어있음. 



재밌고 신나고 좋은데 눈물이 나는 그런 기분을 아시려나요. 이런 아이러니한 느낌은 왠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굳이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으아 공부 재밌다 근데 왤케 서럽고 외롭고 눈물이 나지' 이런 감정이었음.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도 거의 못 느꼈을 감정이었을 거 같은데 그냥 멀리서 좋은 환경, 좋은 기회에 맘 먹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좋으면서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믿고 응원해주는 가족 생각이 나서 힘을 냈다가 가계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미안해 했다가 이런 멘붕과 격한 감정의 파도를 함께 겪거나 적어도 이런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가까이에 없다는 사실에 외로워했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에 신나했다가.... 뭐 그런 감정임. 그나마 난 초기라 이런 감정을 이렇게 글로 쓰더라도 체감적으론 매우 어렴풋하게 느껴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런 과정들을 비슷하게 겪었을 선배 언니들이 그저 매일매일 우러러 보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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