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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n the UK

Mind Control


약 24시간 후면 처음으로, 입학 전 제출했던 프로포절 외에, 끄적인 걸 지도교수님께 메일로 보내드려야 하고 또 다른 24시간 후엔 그걸 가지고 교수님과 미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프로그레스가 없어 프로그레스가.. 오늘 낮에 도서관 가서 공부할 땐 잘 되더니 또 집에 와서 밥먹고 커피 마시고 하다보니 마음이 해이해졌다. 대충 틀을 잡고 어떤 내용을 넣고 너무 오버하지 말고 어느 정도까지만 하자.. 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후로 머리와 손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추석이라 그런지 한국에서도 추석 잘 보내라고 연락이 오고 여기서도 이것저것 같이 해 먹고 수다 떨자는 얘기가 많은데 다 가고 싶고 다 놀고 싶지만 안된다고 하고 집에 쳐박혀서 프로그레스 없는 워드 파일과 점점 콩닥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 내 모습이 .... 기특하다고 하자. 나 스스로 처량하고 안타깝다고 하면 정말 불쌍해질 것 같음ㅜ 


나름 석사 논문도 그렇고 박사 프로포절도 그렇고 관련 분야에서 일도 했고 제안서도 많이 썼고 프로젝트도 많이 해 봤고 ㅋㅋㅋ 해서 금방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교수님은 그저 나에게 어떻게 해보라는 "틀"만 제시했을 뿐인데 그에 맞춰서 조사하고 읽고 생각을 하다보니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가 없고 뭔가 불확실한 점이 있으면 그냥 예전처럼 에라이- 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한 마디로 내 토픽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분석하는 논리나 기준이 다르고 박사과정생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다는 것.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 동안 진짜 대충대충 건성건성 공부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러면서 뭘 또 그렇게 이 분야에 대해서는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지 모르겠다 ㅎㅎ 그런걸 바로 근자감이라고 하지 근자감. 전문 용어로는 Dunning–Kruger effect. 근자감 따위 집어치우고 이틀 후 있을 미팅에서 최소한 내가 읽고 생각한 지점에 한해서는 자신감 있고 똑부러지게 무언가를 discuss 하고 싶은데 그저 소박한 소망이려나. 내가 아무리 자신감을 가져도 부족한 부분이 더 많아서 한동안은 늘 깨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 당당하게 얘기는 해볼 수 있잖아. 깨지는 게 뭐 대순가. 몇 시간 혹은 심하게는 하루 이틀 좀 상실감에 멍하게 있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이 악물고 ㅅㅂㅅㅂ 하면서 하면 되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아침 전까지 어느 정도는 좀 만들어 놔야지. 이 곳 생활에도 좀 적응이 되고 친구들도 좀 생기고 연락 오는 곳도 많아짐에 따라 슬리피데빌님의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오늘 내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쪼끔.... 이기적으로 했으니까 앞으로 이틀 동안 나 자신에게는 좀 더 많이 이기적이어보자. 


그나저나 영어 좀 한국어처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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