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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ing Pains

존재와의 이별



많이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나보다. 이 이야기를 몇 주가 지나도록 미루고 미룬 건 스스로의 감정에 치우쳐서 이별 자체의 슬픔만 기록의 일부로 남길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결국엔 위의 세 문장을 쓰면서 그 날, 그 시간과 똑같은 눈물을 쏟아내야 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기에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 초롱이의 심장이 선천적으로 약하고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며 약도 고통을 아주 약간 줄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을 때 떠올랐던 단어는 안락사였다. 귀찮아서도 자신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장 그르니에가 물루에게 그렇게 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큰 상처를 입어 시력을 잃고 자신감이 없어진 물루를 바구니에 "쑤셔 넣어" 수의사에게 데려갔던 그 장면. 수의사에게까지 가는 길에 있었던 바구니 안에서의 발버둥이 그가 느낀 물루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바구니를 채로 수의사에게 건네고 그대로 안녕. 그리고 그는 고양이 시체를 그대로 집에 들고 와 백화점 쇼핑백에 담아 땅에 묻는다. 


그의 글에서 표현된 모든 "과정" 자체는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침착해 당시 내게는 덧없이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결단만 내리면, 그 순간 이후로 그는 더 이상 고통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나 역시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괴로움과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어. 라는 생각과 동시에 무슨 권리로? 라는 질문도 함께 떠올랐다. 내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 역시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거야'라고 단정짓고 이를 행동으로까지 옮기려 하는거지? 이런 단어를 사용하기는 정말 죽도록 싫지만 인간 세계에서 사람은 "애완 동물"의 주인으로 여겨지고 그러한 관계에서 동물은 선택이라는 의사결정과정 자체를 부여받지 못한다. 초롱이가 우리 집에 온 것도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먹고 자는 행위와 관련해서조차 모든 선택은 사람이 했다. 그런데 삶의 마지막까지 의지든 선택이든 "그"가 무시되는 과정 및 결과는 나로서도 미안할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뭔데. 내까짓게 도대체 뭐라고.


극단적이고 독단적인 선택을 하는 대신, 함께 있을 수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한의 사랑을 다 하자고, 그리고 최대한 그의 행동에 억지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잠으로 보냈다. 그렇게 사람하고 붙어있는 걸 좋아하던 그는 때때로 그러한 느낌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횟수가 갈수록 잦아졌고, 시간적 간격 역시 짧아지게 되었다. 나는 몇 편의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양이 물루를 다시 읽고, 에쿠니 가오리의 듀크를 읽었다. 물루를 읽으면서는 그 순간이 오면 나도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은 금새 눈물범벅이 되었다. 듀크를 읽으면서는 초롱이도,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가지 못했던 곳들에 가면, 그리고 못했던 "말"들을 "나누면" 어떨까- 하고. 너도 듀크처럼 짧은 입맞춤과 함께 "많이 사랑했었어"라고 말해줄까- 하고. 인디고님의 마중나오는 고양이 루피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가 사라지고 난 후의 시간들과 남아있을 기억들에 대해 상상했다. 그가 없어도 그를 곱씹을 나, 그리고 그렇게 고마워할 나. 어쩌면 모든 슬픈 기억을 잊을지도 모르는 나.



졸업식 전날이었다. 그날 아침 그는 또다시 바닥을 뒹굴었고, 엄마는 역시 안락사가 좋겠다고 운을 뗐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스스로도 놀랐을 몸의 급격한 변화들에 아직 힘겨워하고 있는 그를 품고 그건 절대 안된다고,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직 1년은 더, 충분히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서. 


그리고 졸업식. 휴가를 쓴 덕분에 여유로웠던 나는 겨우내내 지저분해진 그의 털을 깔끔하게 자르고 목욕을 시키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잠으로 보낸 탓에 몸 여기저기가 털로 뭉쳐있었다. 가위로 슥삭슥삭 잘라내다가 나도 모르게 옆구리 부위에 작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생각만큼 피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가만히 잘 있던 애를 괜히 내가 건드려서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동동거리며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계속된 이발과정에서 그는 또 한 번 기절했다. 쓰러진지 만 하루도 안 되어서였다. 여느때처럼 재빨리 안아 몸을 마사지하자 금새 괜찮아져 작업을 계속했다. 슥삭슥삭.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깔끔해지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다듬기만 끝내고 우리는 목욕탕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욕을 다 끝낸 후엔 또 얼마나 예쁠까. 샴푸를 끝내고 린스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바닥에 힘없이 엎드렸다. 배를 닦으려면 서 있어야 하는데, 안아서 네 발이 땅을 짚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도 힘없이 무너지는 다리를 무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자 꼬리를 흔들면서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 빨리 끝내고 꼭 껴안아줄게.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며 그는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하루에 세 번이나 쓰러지다니, 위험하다고 불안해하며 몸을 마사지 하는데 갑자기 숨이 멈췄다. 강아지가 쇼크로 쓰러졌을 때 심장 마사지를 하면 괜찮아진다는 글을 읽었던 걸 기억해내 본능적으로 심장을 한 손에 쥐고 규칙적으로 강하게 운동을 반복했다. 그러자 갑자기 숨이 돌아오더니 그대로 큰 한숨을 내쉬고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고 말았다. 내가 잘못느끼는 거야, 생명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거야.라고 홀로 되뇌이며 계속해서 몸을 주물렀다. 약 1분 여동안 똑같은 행동, 이름과 정신차리라는 말을 반복해도 힘없이 떨어진 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정말이지 이렇게 쉽게 끝이 오는건가, 그토록 내가 두려워했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집에 홀로 남아있었던 나는 곧 집에 오겠다는 아빠, 그리고 나와 같은 소리로 울고야마는 엄마와의 전화를 끝내고 젖어있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숨이 사라진 몸을 처음 만져보았다. 생의 끝에 다다른 모습을 접하면 아무리 내가 사랑했다하더라도 두려울 거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그의 축 늘어진 몸은 그대로 사랑스럽기만 했다. 몸을 깨끗이 정리하고, 목욕을 하는 등 의식이라 할 의식은 이미 치루었다 생각한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몸을 반듯하게 펴고 새하얀 수건으로 -반드시 하얀색이어야만 했다- 감싸안았다. 몸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혹시나 심장이 다시 뛸까하고 몸을 자꾸만 만져보았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부모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눈도 감지 못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드렸다. 모두의 뜻에 따라 화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침이면 그는 동물병원에서 화장터로 옮겨져 몸마저 사라질 것이었다. 아빠가 모든 과정을 책임지기로 하고 갑자기 쇼핑백을 집어들었다. 마치 그르니에처럼. 그 모습에 경악한 엄마와 나는 또 다시 눈물을 쏟아내면서 절대 안된다며 그의 몸을 누일 조그마한 상자를 찾아냈다. 몸에 딱 맞는 크기의 상자를 찾아 하얀 수건에 싸여있는 그의 몸을 눕히고 뚜껑을 덮어 베란다에 두었다. 


처음으로 그가 없는 밤을 보낸 나는 시름에 뒤덮여있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 스스로를 계속해서 다독였으며, 그가 깨우러 오지 않는 아침에는 결국 전날 밤보다 더 많이 울어야만했다. 이렇게 슬픈데도, 그가 없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야속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10년이나 되는데, 지난 시간을 돌아볼 시간은 10시간도 주지 않는 삭막한 삶에 모든 의지가 사라지기도 했다. 너가 사라지면 내 삶은 온통 바뀔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하고. 


그리고 3주가 지났다.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던 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격렬하게 표현될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고, 나조차도 정리되지 않은 시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해 기억이나 감정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내 감정은 아직도 극렬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이제는 그래도 울지는 않을 것만 같아 기록하기로 마음 먹은 후 중간에 몇 번이나 그 날 그 때의 상태로 돌아갔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줄 수 있었다는 것.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식은 그의 몸을 발견했다면, 그 아픔은 지금의 몇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가 소중했던 까닭은 존재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렇게 따뜻해지고 의지할 수 있었던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그가 있었기에 내가 다른 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별은 슬펐고 슬프지만 아픈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아주 희미하게 남거나 아름답게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그 덕분에 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적 학습을 또다시 반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친구 여러분이 걱정해주시고 사랑해주신 초롱이는 이제... 아니 3주 전부터 세상에 없었습니다. 
종종 안부 물어주어 감사했어요. 언젠가 또 웃으면서 이야기 할 날이 오겠죠.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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