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가 시작되기 약 한 시간 정도 전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거리에 늘어서 있는데, 맨체스터에 도착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걸 처음 목격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게이 페스티벌이라 그런지 세련되고 예쁜 사람들만 잔뜩 있는 것만 같아서 그냥 집 앞 슈퍼 가는 복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던 나는 가방을 뒤적거려 선글라스로 신경쓰지 않은 티가 확 나는 비루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한 자리에서 퍼레이드 행렬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행렬이 시작되는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약 20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행렬의 머리에 해당하는 무리들을 만났고, 그들을 향해 보내는 환호와 박수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60세는 족히 넘어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퍼레이드에 참여한 모습을 보면서 이성애자로서 뭔가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정말 행복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살아왔을 그들의 인생에 경의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이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에서 우연히 경험했던 San Francisco Pride의 "Global Equality"가 굉장히 하드한 느낌이었다면, 맨체스터의 느낌은 굉장히 평화롭고 젠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밤이었고 맨체스터는 낮에 봐서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샌프란시스코에서 내가 본 건 알콜과 대마의 향연이었다.
어쨌거나, 각 게이 커뮤니티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이나 현판 등을 들거나 차에 장식하고 그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길을 행진하면서 퍼레이드가 펼쳐지는데, 위의 사진에 있는 The Co-operative Group이나, 아래의 Big Issue 깃발을 보며 "이 곳에 공부하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사회적 가치들은 서로 얽혀 있음에 따라 단 하나의 사회적 가치만 불균형하게 인정을 받는다던가 무시를 받는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처럼 The Co-operative Group, Big Issue 모두 성정체성과 관련된 조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게이문화를 대표하는 축제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아마도 사회적기업이라는 정체성 하에, 다양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덤으로 기업활동을 게이 커뮤니티에 홍보도 하고.
그렇게 타 기업 및 문화의 사회적 가치에도 신경쓸 겨를이 있는 것은 문화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사회적기업"의 활동이 영국에서 안정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적응하기에 바빠서 내 연구 주제를 제대로 되돌아볼만한 겨를이 없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퍼레이드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사람들이 "영국 가니까 좋은 점이 뭐야?" 라고 물어볼 때마다 할 말이 없었는데,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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