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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n the UK

나는 생활자가 아니다


지금은 학기 초라 앞으로의 학업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덕션 기간이고.. 10월 초부터 진짜 학기가 시작된다. 지도교수님도 만났고 벌써부터 Literature Review를 짧게라도 가지고 오라고 하시니... 참 아름다운 분이다. 네. 그렇게 생각해야죠. 이런저런 이야기 전에 잠깐 지도교수님과의 미팅을 기록하자면


1. 생각보다 이것저것 질문을 깊게 하셔서 멘붕이 옴

2. 콩글리시 및 비문으로 막 떠듬

3. 교수님 표정이 ㅡㅡ 이렇게 되었다가, 정말 친절하시게도 "그러니까 니 말은 이렇다는 거지?" 라고 정리해서 얘기해주심 (다행 ㅜㅜ) 

4. 그러나 영어 수업 들을 수 있음 들으라고 하심 

5. 왜 이 학교를 선택했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딴데서는 석사부터 다시 하라고하는데 여기서는 Phd 오퍼 줘서 왔다고 친구들끼리 우스개 소리로나 하던 말을 진짜로 교수님 앞에서 내뱉음

-> 정답은 "리서치 네트워크, 연구 역량 및 환경 등이 좋아서 선택했고 최종 오퍼를 받아서 기뻤습니다." 

6. 교수님 방 나올때 bye bye~ 라고 말하면서 한국식으로 90도 .. 아니 120도?는 족히 될 정도로 꾸뻑 인사 하고 나옴 


3일 정도가 지났는데도 잘 때 마다 이불 뻥뻥 차면서 악악악!!!!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차고 질러도 나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기분은 영 사라지지가 않아... ㅜㅜ 어쨌든 이런 식으로 첫 1년 동안은 진짜 밤마다 쳐 울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굴러보자고 마음을 굳게굳게 먹고 있다. 


얼마 전, 저녁 즈음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처음으로 맨체스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따라 그렇게 싫었던 매일 내리던 비도 잠깐 건물 아래에 서서 기다리면 금방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비가 계속 내리는 날이면 맘 편히 우비를 입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습하게만 느껴지던 공기도 미치도록 싫었던 겨울 냄새가 갑자기 상쾌하게 느껴졌던 몇 년 전 그 날 같아서 갑자기 "어, 나 여기서 잘 살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5분 정도 후, 다시 든 생각은 바로 "나는 생활자가 아니다"라는 것. 내가 이 곳을 내가 거주할 곳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애초에 생활환경 따위 어떻든 내게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아니었던가. 물론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생활 환경이 정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매우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보다 그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하게될 것만 같은 예감이 바바방. 


이런 생각이 마치 위기감처럼 다가온 이유는 내 본 목적과 달리 지난 한 달 동안 나의 행동이나 마인드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생활 측면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집을 구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세금이나 인터넷 등을 관리하고 동네를 구경하는 등... 책이나 자료들을 거의 보지 못하고 그저 사는 문제에 급급해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이클을 다시 공부 쪽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학생으로서 굉장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이런 위기감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어쩌면 더 다행인지도 모르겠고... 지금도 내 모든 시간과 집중력과 에너지를 100% 이상, 200% 이상 발휘해서 공부하고 읽는 데 쓰는 게 힙겹지만 공부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꾸 스스로 다지다보면 언젠가 "생활자가 아님"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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