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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ing Pains

최근의 발견들


나는 뻬쩨르부르그 구역에 있는 어제의 그 음식점 앞을 일부러 지나쳐서, 바실리예프스끼 구역으로 가서 커피를 실컷 마셨다. 그 음식점도, 그리고 꾀꼬리도, 내게는 왠지 더욱 밉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상한 성격이지만, 나는 장소나 물건을 사람과 똑같이 미워할 수 있다. 그런 곳 대신에 나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내 맘에 드는 곳을 몇 군데 알고 있다. 그곳들은 내가 언젠가 어떤 이유로 해서 행복감을 느꼈던 장소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장소들을 아껴 두고 일부러 가급적 거기에는 안 가기로 마음먹고 있다. 그 이유는 언젠가 나중에 내가 완전히 고독하고 불행하게 되었을 때, 그리로 가서 실컷 슬픔과 추억에 잠기기 위해서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미성년 上, 열린책들, p.249


스스로 장소에 꽤나 민감한 인간이라는 걸 우연히 알아버렸다.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당시의 분위기, 말, 행동, 느낌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난 장소가 꽤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일을 생각하면 그 장소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생각하면 어떤 일이 생각나는 식이다. 보통 "그 일은 <어디>에서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어디>에서 그 일이 일어났었지"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제는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해 눈을 들어 어디쯤 왔는지 확인했더니 바로 신촌역이었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알 수 없는, 어쩌면 괴로운 표정일지도 모르는, 얼굴로 아래 쪽을 응시하고 있던 그 사람의 모습, 그리고 그 날의 급작스런 울음도 떠오르면서, 아아 그런건가, 라고 생각했다. 머리로 알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다니, 본능적으로 공간에 민감한 건지 아니면 내가 이번 역이 신촌역이었다는 걸 미리 알고있었는지에 대해 한참을 곱씹었다.


내게 장소는 행복한 일이 일어났었거나 슬픈 일이 일어났었거나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은 특별함으로만 남는다. 그 기한이 언제까지 유지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면, 행복했었다해서 반드시 찾아갈 이유도, 불행했었다해서 반드시 피할 이유도 내게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언제인가?" 에 대한 대답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행복하다고 느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져서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행복했다고 기억할 수도 있고 반대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기억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소에 대한 느낌도 그 순간,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그 때까지만 남아있을 뿐이지 기억 속에는 그저 하나의 무미건조함으로 자리잡게 된다.


최근 어떤 관계에 있어 변화가 생김에 따라 나 자신 역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장 흥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이중성이다. 우선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게 된 것 같다.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그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 그리고 어쩐지 먼 미래보다 바로 몇 년 후의 미래는 상상할 겨를이 없는 숨가쁨이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에게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두렵다. J에게 걸려온 전화에, 다짜고짜, 그런데 나 무서워. 라고 말해버렸다. J는 현재가 가장 중요한 거라며 제발 그러지 말라는 신신당부의 말을 남겼지만,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쓸데없고 쓸데없고 또 쓸데없는 상황설정임을 알지만, 결국 결론을 멀어지는 것보다 멀어짐을 당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음으로 내려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발견한 점은 이러한 사실이 의외로 꽤 발전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언제 자연히 멀어지든 멀어짐을 당하는 것이든 두려워한 적이 있었던가. 뭐든지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그렇게 두지 않았던가. 그건 아마도 항상 내 자신이 "강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무언가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대상에 어쩌면 집착일수도 있는 감정을 쏟아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자 '의외로 내게도 이런 면이 있었군.' 하고 신기함을, 즐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사실은 근 몇 년 간,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대단한 열정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그냥 있었다". 열정은 열정이나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도가 어떻던간에 스스로 모든 것에 무신경해지고 그에 따라 감정의 변화 역시 굉장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었다는 점에서 최근 이러한 경험 및 발견은 감정적, 정신적인 면에서 상당히 발전된 것으로 스스로에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바라는 건 어디에나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권력관계가 이번만은 적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즉, 상호간 예민해짐이 서로 자신이 "약자"의 입장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관심과 열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적절히 조화를 이룬 "감성과 이성"의 판단 그리고 대응으로 섣부른 추측이나 결심을 해버려서 괴로워지지 않았으면. 어쨌든 J 말대로 지금 당장은 잃어버리거나 잃어지거나를 걱정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그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아주 조금만 더 지나면 이 까짓 일들을 걱정했던 게 어떤 관점에서든 바보같았던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가장 문제이기도 하고 가장 다행이기도 한 건 모든 인간은 상처받기를 두려워 한다는 것.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건 지금. 그리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