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진작에야 끝난 것 같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도 햇빛이 쨍쨍한 날이 이삼일에 한 번 정도는 있고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따뜻하니까.
내일 미팅이라 지금 사실은 대충 후려갈겨 놓은 문장들을 에디팅 해야 하지만 손이 안 간다.
이 곳에 온지 3년 만에야 8월은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패딩으로 감싸고 다녀도 3월은 봄이 시작되는 시기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몇 개월이면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감이 무색하게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 이제서야 여기서 사는 게 어색하지 않네- 라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 한국에 있는 것들, 한국과 관련된 것들로부터도 많이 멀어진 느낌이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차트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궁금하지도 않고. 얼마 전에 한국에서 온 친구가 다녀 갔는데 친구가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이나 가수 얘길 할 때마다 그게 누군데?? 라고 되물었다. 반면에 영국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뭔지 다 알고 있는 걸 보고 친구가 어색해 했다.
한동안 연락을 자주 하던 친구들, 교수님들 과도 어느 순간 잘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아무래도 서로 할 말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만나서 얘기하면 모를까. 아무래도 전자 메세지로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장거리 연애도 끝나가는 느낌. 마치 8월의 여름과 같이, 인정하기 매우 힘들었고 지금도 인정하기 힘들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도록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갖 짓을 다 해 보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
이유는 많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변해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자리를 옮긴 지 3년이 지나니 내가 익숙해 하던 것들은 어느새 어색해지고 어색해 했던 것들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나를 익숙하게 생각했던 그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어색해졌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변해서 일지도. 3년은 긴 시간도 아니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니까.
영국의 겨울은 한국보다 춥지 않으니까 다시 올 여름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힘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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