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in the UK

늙는다


나이듦이 느껴지는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몸은 나았다 싶으면 아프고 아주 좋아졌다가도 조금만 무리하면 아프고 한 번 아프면 회복도 잘 안 되고 그렇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여기서 보내면서 그냥 늙어가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모르겠다. 한국나이로 막 서른이 되던 해에는 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차 있었는데 영국나이로 서른을 넘기는 올해는 몸 컨디션이 영 안 좋아서인지 "아, 나도 늙는구나????" 이런 생각 밖에 안 든다. 


늙어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이사인데, 짐싸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오랜만의 이사라 그런가... 짐 싸는데 많은 시간이 들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온 몸이 쑤시고 피곤한지 모르겠다. 2-3년 전만 해도 이사 정도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올해는 그냥 힘겹고 고되기만 하다. 체력의 문제인지 타이밍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몸으로 느껴지기에는 그저 노화 때문인 것만 같은.


다시 혼자 사는 집으로 이사간다. 무려 2년 반만의 자유다. 다시 혼자 살게 되면 밤에도 이것저것 음식 해먹고 술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빨래도 아무 때나 막막 돌리고 친구도 집에 놀러오라고 하고 옷 벗고 돌아다니고 등등 뭐 사소한 계획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기대되는 건 "아, 드디어 혼자다." 라는 안도의 느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되돌아보면 집에 누군가가 계속 있으니 지난 2년 반 동안 늘 집에 있어도 긴장 상태였던 듯 하다. 뭘 해도 조심조심 조용히 움직여야하고 심지어 엄마 아빠랑 통화를 할 때도 속삭여야하고. 이제 그런 생활이 끝날 거라는 기대에 행복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난 자유다. 그리고 드디어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다. 



논문은 이제 완성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오늘 대충 차례를 만들고 워드로 옮겨봤는데 제출 규격에 맞춰서 편집해보니 총 8만자에 320장이 나왔다. 여기에 레퍼런스에 부록까지 합해지면 겁내 두꺼워질 듯 하다. 또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챕터 그리고 소소한 섹션들이 있기 때문에 걔네들까지 집어넣으면 350장은 족히 나올 듯.... 나도 해보고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이 썼지..... 하고 깜짝 놀랐다. 물론 양보단 퀄리티가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두 달은 퀄리티 향상에 힘쓸 예정. 싸이테이션도 충실히 달고 이론이나 이 전 연구들 착실히 업데이트하고 인터뷰 내용도 더 추가하고 테이블이랑 각종 그림? 등을 더 손봐야한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힘내서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도 올렸는데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부분발췌한 이 컷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38715) 보고 용기를 얻었다. 견디면 지나갈 것이라는 것. 



내 까짓게 왜 맨날 난 이따위일까. 왜 난 더 잘할 수 없을까. 왜 모티베이션이 없을까. 완전 고민하고 땅파고 들어갔는데 답은 완전 심플한 것이었다. 내 까짓게 뭔데. 그냥 나는 그런 존재이고 그런 인간인 것이다. 그 순간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냥 "내 까짓게 정신"으로 인정하고 그냥 지나가면 견뎌진다는 걸 자꾸 마음 속에 심으면, 뭐.... 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뭐 이 세계 유일한 연구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연구를 하자는 건데 - 견디는 것도 못하면 어찌하나. 그냥 견뎌야지. 존버 정신으로. 


박사 학위 따는 건 정말 버티기 게임이라는 걸 시간이 지날 수록 깨닫고 있다. 누가 더 오래 힘겨워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버티고 견뎌내서 끝을 보느냐의 게임. 다 왔다. 몇 개월만 더, 힘을 내자. 그 이후에 또 분명 "내 까짓게", "견디자" 라는 말을 되뇌이는 순간들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은 우선 현재만 생각하고 버티자. 




언제나 이어지는 수퍼바이저 얘기.... 


사실 8만자나 만들어 낸 공은 모두 다 수퍼바이저에게 있다. 4년차를 시작할 때 즈음에 가지고 있던 양은 4만자 정도였던 거 같은데 1년 사이에 두 배로 불어났다. 그 이유는 다 지도교수가 착실히 나를 쪼아주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뭐에 대해서 얼마큼 써오라고 늘 데드라인을 줬고 데드라인 맞추는 거 하나는 잘 하는 나는 꼬박꼬박 뭔가를 써갔다. 교수는 뭐 늘 다 읽고 코멘트를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방향성은 늘 체크했고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를 늘 확인했다. 뭐 그러다보니 어느 새 8만자가 됐네..... 나도 언제 다 썼는지 기억은 전혀 없다. 그냥 써간 것들을 모으니 이만큼이 된 거라, 오히려 라이팅업 하는 4년차에 연구 자체에 대한 압박은 덜 받았던 듯... 


마지막 한 해 동안은 내가 뭘 하고 있고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고 어떻게든 이 모든 과정을 끝낼 수 있기는 있다 - 죽이되든 밥이되든 - 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 전년도처럼 혼자 울고 지랄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시간은 아예 없었던 듯. 오히려 즐겁고 행복하게 마무리 과정을 즐기고 있는 듯 한데 이 역시 다 수퍼바이저 덕분이다. 


오늘 마침 수퍼바이저한테 이메일을 받았는데 9월 말에 만나자고..... 그래서 그 동안 심하게 아팠어서 계획보다 늦어졌는데 어쨌든 풀드라프트 준비해서 보내겠다고 하니까 오는 답장이 "너무 걱정하지 마. 몇 주 정도는 얘기해서 제출 기한 늘릴 수 있으니까 너무 서두르지마" 라고 왔다. 


이 분은 정말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것..... 이거나 이분의 수퍼바이징 스타일이 나랑 너무나 잘 맞는 것.......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왜 더 열심히 하려는 모티베이션이 없을까. 1, 2년 차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고 그랬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따위로 게으르고 공부하기 싫어할까. 라는 고민 때문에 여기저기 상담을 했다. 대부분이 큰 정신적 타격을 받아야 다시 열심히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큰 정신적 타격이란 - 교수한테 개 욕쳐먹거나 컨퍼런스 등에서 개 까이거나 잡 마켓에서 개 실패하는 경우들을 아우른다. 


근데 난 교수가 저렇게 나 마음 편해지라고 데드라인 늘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너 페이스대로 마무리해라... 라는 메일을 보내주니까 겁내 모티베이션이 샘 솟아 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 앞에 무서운 현실이 아니라 뭐가 어찌 됐든 나를 위한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생각하니까, 오 그래??? 그렇담 얼른 더 열심히 해야징 ㄹㄹㄹㄹㄹㄹ 이런 마인드가 된 것....


우리 지도교수 정말 조련 짱이다. 저런 한 마디 한 마디가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고 안정감을 줘서 나는 지금까지 견뎌냈고 아직까지 견딜 수 있었고 또 견디겠지. 


내일 열심히 이사하고 또 몸살만 안 났으면. 다음 주 일주일 정말 중요한 일주일이 될 것.....